'10·26 사태' 김재규 재심 열릴까…유족 "역사 바로잡을 기회"

서울고법, 김재규 재심 사건 심문기일 진행
유족 재심 청구 4년만…여동생도 심문 참석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 증인 채택돼

'10·26 사태'로 사형을 선고받은 고(故)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문에서 유족 측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라며 재판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이재권)는 17일 오후 4시 김재규의 내란목적 살인 등 혐의 재심 사건 심문기일을 열었다.

1980년 김재규가 사형에 처해진 지 44년만, 유족 측의 재심 청구 후 4년 만이다.

이날 심문에는 김재규의 여동생 김모씨가 청구인 자격으로 출석했다.



김씨는 자신을 "김재규 장군의 셋째 여동생"이라고 밝힌 뒤 "큰 오빠가 돌아가시고 44년이 흘렀고 몸도 마음도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운을 뗐다.

그는 "신군부의 불법 개입으로 재판이 정당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왔고 이를 근거로 재심을 신청하기로 마음 먹었다"며 "다시 재판이 열린다면 공정하게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 "재심을 통해 김재규 장군과 뜻을 함께한 5명의 명예가 회복되길 간구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온 국민이 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재심이 속히 개시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씨 측은 김재규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살해 행위가 당시 유신정권 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재심 청구 이유를 설명했다.

변호인 측은 "피고인의 행위가 여러가지로 평가되지만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말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향한 행위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며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부득이한 살인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변호인 측은 당시 김재규에게 내란죄를 확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재판 과정에 절차적 문제가 있다는 취지도 밝혔다. 당시 김재규 측이 요구한 증인신문 등이 배척됐다는 점에서 변호인의 조력권이 침해됐다는 주장 등이다.

변호인은 "초기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변호인의 조력권은 유린됐으며,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됐고 피고인이 요구하는 증인신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변호인들이 공판조서조차 볼 수 없었던 방어권이 철저하게 유린된 역사"라고 비판했다.

또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은 피고인이 '대통령이 되려는 야욕에서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했지만, 피고인의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와 같은 표현은 조서에 빠졌다"면서 "박정희 살해 동기의 회복을 큰 틀에서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유만으로 충분히 피고인에 대한 재심 개시 사유는 충분하다는 판단"이라며 "역사의 법정이 될 수 밖에 없겠지만 사법부가 이를 밝혀 신군부의 실체가 밝혀지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재판부는 김씨 측 요청에 따라 오는 6월12일 오후 당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에 대한 증인 신문을 진행한 뒤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이날 심문 종료 후 유족 측 변호인은 "김재규의 재심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임을 별론으로 하더라도 사법적으로 제대로 된 이름 붙여줘야 한다"며 "당시 유신독재의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항거행위임을 사법적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나"라고 재심 청구 이유를 설명했다.

'재심을 신청할 결정적 증거가 있나'라는 질문엔 "의도적으로 법정에서 진행한 진술 내용이 왜곡되게 서술된 내용이 있는 걸로 확인됐다"며 "당시 보안사, 신군부에 의해서 이 사건이 어떻게 왜곡되고 과장됐는지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김재규의 외조카 김모씨는 "(재심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시작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건지 한 번쯤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값어치 있는 일"이라며 "외삼촌(김재규)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다음 날인 27일 보안사령부에 체포됐다.

이후 한 달 만인 11월26일 군법회의에 기소됐고 같은 해 12월4일부터 12월20일 선고까지 재판 개시 16일 만에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제기된 항소심은 6일 만에 종결됐고, '10·26 사태' 이듬해인 1980년 5월24일 대법원 판결 사흘 만에 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40년여 만인 2020년 5월 김 전 부장 유족 측은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단 취지로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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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 김금준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