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창 발포명령 확실치 않다"…5·18 계엄군 증언 별무소득

5·18부상자회 증언회 참여 최명용 전 3공수여단 장교
"상황실 근무로 현장 상황 몰라" 답변만…'맹탕' 지적
5·18민주묘지 참배 방명록엔 문구 예시 그대로 작성

5·18 일부 단체와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가 5·18 당시 투입된 계엄군을 초청해 두번째 증언회를 열었지만 이렇다 할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증언회에 참석한 계엄군은 과거 언론보도를 비롯,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내용을 되풀이했다.

지난달 첫번째 증언회 당시 참여한 계엄군도 과거 자신이 수차례 관계 기관에 증언한 내용들을 반복한 바 있어 두 차례 열린 증언회가 모두 소득 없이 끝났다.


▲ 20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5·18부상자회 등의 계엄군 증언회 도중 5·18 당시 부대 상황실장으로 근무했던 최명용 예비역 소령이 발언하고 있다. 2023.04.20.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 특전사회는 20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오늘의 증언이 5·18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는 이름으로 두 번째 계엄군 증언회를 열었다.

증언회에는 5·18 당시 대위 직급으로 3공수여단 정보보좌관을 역임한 최명용씨가 나서 진술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그는 1980년 5월 18일 이전 광주에 먼저 투입, 전남대학교에 차려진 진지 상황실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다.

그는 그해 5월 21일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주둔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 과정, 이후 시신을 수습하며 벌인 암매장과 관련한 당시 내용을 밝혔다.

그는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속 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 내려오면 알아서 조치하라'는 지시가 먼저 내려왔던 상황이었다"며 "죽기 싫으면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으니 사실상 발포 명령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광주교도소로 연행된 사람 수는 200여명으로 보였다. 이들을 트럭 2대에 나눠 싣는 도중 터트린 최루탄을 트럭 안에 집어넣기도 했다"며 "사병들을 시켜다 이 과정에서 숨진 시민들을 광주교도소 공동묘지에 묻게 했다"고 증언했다.

또 "최소 12구에서 많게는 17구를 암매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만 그 터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최루탄을 터트려 트럭 안으로 집어넣은 사람을 알고 있으나 말하기 곤란하다"며 "이후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송정비행장에서 (정호영) 특전사령관의 철수 지시를 받고 원대로 복귀했다"고 밝혔다.

그는 증언회 도중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애쓴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이 자리를 빌어 사죄드린다. 또 당시 희생됐던 사병들에 대해서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쟁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현장에 없어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고 일관했다.

금남로 헬기사격의 유무, 광주교도소 내 시민 학대 가담 계엄군의 신원, 암매장 시신의 사후 처리 과정 등에 대해서도 '직접 보지 않아 모른다'고 했다.

광주교도소로 주둔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향해 이뤄진 계엄군의 사격과 관련, 이를 지시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답했다.

5월 20일 광주역 시위 진압 당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의 권총 발포는 있었으나 이를 집단 발포 명령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도 했다.

광주역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자들의 수 또한 당시 확인할 수 없었다고도 했다. 1995년 검찰 조사 결과 당시 숨진 광주 시민 수는 4명으로 집계됐다.

최씨의 증언은 새로운 내용이 없고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변이 이어지면서 잇단 증언회가 사실상 '맹탕'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과거 5·18진상조사위의 조사에 참여, 광주역 등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설명한 바가 있어 이날 증언회가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자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앞서 지난달 열린 같은 여단 소속 김귀삼씨의 증언회 당시에도 일찍이 조사되거나 알려진 내용들을 위주로 한 증언이 이뤄졌다는 일각의 지적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5·18진상조사위 한 조사관은 "(조사 대상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온전치 못하거나 주변의 주장에 흔들리는 등 어려움이 있다"며 "자신이 생각했을 때 확실한 사실만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사실이 없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다"고 했다.

증언회를 마친 그는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로 이동, 추모탑에 분향·묵념한 뒤 5·18 최초 희생자인 고(故) 김경철 열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참배 과정에는 "민주화운동을 위해 애쓴 분들이 모여계시는데 그 분들께 감사하다고 생각한다"며 "가끔 올 생각이다"고 말했다.

민주묘지 방명록에는 예시 문구인 '5·18 정신을 받들어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를 그대로 옮겨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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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장진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