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 "가와사키중공업, 위자료 1538만여 원 지급" 주문
소송 4년5개월 만…유족 "평생 집 밖 못 나가는 트라우마"
"국민 보호해야 할 국가 어딨냐" 제3자 변제 해법안 성토
일제강점기 군수물자 생산 공장에서 강제 노역으로 고초를 겪은 피해자의 유족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광주지법 민사3단독 박상수 부장판사는 22일 열린 일제 전범기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상기씨의 아들이 일본 기업 가와사키중공업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장은 '피고인 가와사키중공업은 원고 김씨(피해자 유족)에게 위자료 총 1538만4615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지난 2020년 소송이 제기된 이래 4년5개월 만에 1심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해당 재판은 국제 송달 등 문제로 지연돼왔다.
원고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고 김상기씨의 아들이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진행 중인 가와사키중공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유일한 원고이기도 하다.
가와사키중공업 측으로부터 고 김씨가 입은 피해는 인정했으나, 유족 중 아들 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상속분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봤다.
앞서 원고인 김씨의 아들은 자신의 상속분에 대한 위자료 채권에 대해서만 소를 제기했다가 올해 1월 나머지 유족들의 상속분에 해당하는 채권에 대해서까지 청구 취지를 확장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대법원이 일본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전원합의체 판결(2018년 10월 30일)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야 권리 행사에 나선 만큼 아들을 제외한 유족들의 위자료 채권은 시효기간 도과로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전남 순천 출신의 강제동원 피해자 고 김상기씨는 18살 되던 해인 1945년 2월부터 8월까지 일본 효고현 고베시 소재 가와사키차량주식회사(현 가와사키중공업) 내 기관차·전쟁 무기 제작에 동원됐다.
그는 생전에 남긴 경위서에서 미군 전투기의 집중 폭격으로 총탄이 빗발치고 머리를 스치는 경험으로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고, 강제노동의 고통과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됐다고 썼다.
억울함을 풀고자 당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가와사키차량 주식회사 주소 등을 정확히 기록해 놓기도 했다.
원고인 김씨의 아들은 소 제기 당시 "아버지께서는 '죽어서라도 한을 풀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선고 직후 원고이자 아들은 취재진과 만나 "아버지께서 손수 다 기록해놓은 내용을 보니 철부지 청년이 그렇게 끌려가 수모를 당했다. 강제노역 중에는 짐승도 먹지 못할 밥을 얻어 먹으며 노예 아닌 노예처럼 살았고 '총알받이' 역할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군수 물품을 만드는 일이라서 미군 폭격에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다고 하셨다. 그 일로 아버지께서는 평생 고통 속에 살았다. 귀국 이후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 가족이 망가졌는데도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어딨느냐.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며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인 이른바 '제3자 변제'를 에둘러 비판했다.
앞서 2018년 대법원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승소 판결 이후 광주에서는 피해자들의 집단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광주·전남지부와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등의 지원으로 잇따라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승소하고 있다.
2019년 4월 제기한 1차 소송(피고 전범기업 9곳·원고 54명)에 이어 김씨 유족을 비롯한 33명이 2차 집단 손해배상소송에 나섰다.
2차 소송의 기업별 원고는 ▲홋카이도탄광기선(현재 도산 기업) 15명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머티리얼) 9명 ▲미쓰비시중공업 4명 ▲미쓰이 광산(현 니혼코크스공업) 3명, 가와사키중공업·니시마쓰건설 각 1명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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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장진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