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지시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포기 강요
국가 불법행위에 의한 재산 손해·정신적 고통 인정
박정희 정권 시절 강제로 염색 기술 특허권을 빼앗긴 발명가 유족에게 국가가 약 7억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판사 이세라)는 직물 염색 기법인 '홀치기'를 발명한 고(故) 신모씨의 자녀 2명에게 국가가 각각 약 3억7000만원씩 총 7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신씨는 1965년 홀치기 기법과 관련한 특허를 등록했다. 다른 국내 업체들과 특허 분쟁에 겪었지만 1969년 특허권을 얻어냈다.
신씨는 특허권을 얻은 이후 기법을 모방한 업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심은 업체들이 신씨에게 5억2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을 준비하던 신씨는 1972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자진 취하하는 동시에 특허권 권리 주장을 일절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자필 각서를 썼고, 결국 소송을 취하했다.
신씨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배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홀치기 수출조합은 1심 판결 이후 1972년 5월30일 개최된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상공부 장관에게 "민사소송 판결 때문에 업계가 마비돼 수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건의했다.
박 전 대통령은 상공부 장관의 보고를 받고 "1965년부터 제기된 문제점을 아직까지 시정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 법을 악용하는 업자와 악법을 개정하지 않는 상공부가 똑같이 나쁘다"고 질책했다.
신씨는 이같은 회의가 진행된 다음날 중앙정보부로 연행됐다. 이후 1974년 법원에 "신체의 자유를 잃은 상태에서 제3자의 폭행과 협박에 의해 작성된 취하서에 소위하 의사 없이 날인한 것"이라고 기일지정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씨는 지난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해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신씨는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신씨의 유족은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지난 2021년 과거사위에 다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과거사위는 지난해 2월 신씨의 사건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고서라도 수출증대를 국가 활동의 지상목표로 인식한 대통령, 상공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이 기업의 고충을 처리하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망인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건"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불법 체포·감금·가혹행위에 의한 조사 행위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로, 그로 인해 망인이 이 사건 소취하서에 날인함으로써 회복하기 어려운 재산적 손해 및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이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공무원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중대한 인권침해행위가 자행된 경우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억제·예방할 필요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연 이자를 더하면 신씨의 유족이 받게 될 돈은 약 23억6000만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신씨가 1972년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금액 5억2000여만원과 지연이자,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를 반영해 배상액을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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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 김 훈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