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집무실 방문' 윤공희 대주교…"5·18 함성 여전히 메아리"

 "43년 전 광주 시민들의 함성이 메아리치오."


▲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사진 왼쪽)가 30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6층 옛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980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재임 당시 5·18민주화운동을 두 눈으로 목격, 이후 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투신해온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30일 오후 자신이 일했던 옛 광주가톨릭센터(현 5·18기록관) 내 집무실을 40년 만에 들러 이같이 말했다.

이날 윤 대주교는 지난달 진행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12주년 기념 평화메달 수여식 당시 메달을 받은 공로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고(故) 명노근 전 YMCA 이사장의 아내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와 이기홍 변호사, 윤광장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김준태 시인을 만나 43년 전 광주의 희생을 곱씹으며 감회에 젖었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월 19일 가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계엄군이 벌이는 금남로 위 만행을 직접 목격했다. 수많은 계엄군이 청년들을 잡아다 옷을 벗기고 길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 등 참혹한 장면들이다.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그는 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5·18 항쟁 기간에 소준열 당시 계엄분소장을 만나 '계엄군의 만행을 인정하고 상황을 수습하라'고 촉구하는 한편, 시민수습대책위원 대변인이었던 김성용 신부로 하여금 광주를 빠져나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진상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이듬해인 1981년 5월부터는 매년 동구 남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집전하며 5·18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명예회복 운동에 나섰다.

윤 대주교는 이날 간담회 자리에서 1981년 3월 31일 전두환을 만나 당시 5·18 내란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고(故)정동년 5·18재단 이사장 등 5명에 대한 감형을 촉구했다고도 증언했다. 정 이사장 등 5명은 전두환 신군부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지목돼 수배됐다가 붙잡혔다.

윤 대주교는 이튿날인 그해 4월 1일에도 전두환을 만나 감형을 거듭 촉구했으며, 이같은 요청은 4월 3일 전두환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통한 감형 발표로 이어졌다.

간담회를 마친 그는 5·18을 목격했던 건물 6층 집무실을 찾았다. 윤 대주교는 1983년 가톨릭센터 이전 직전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집무실을 다시 찾는 것은 40년 만에 처음이다. 현재 집무실은 2015년 5·18기록관으로 새단장된 이후 윤 대주교와 관련된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윤 대주교는 당시 그가 남겼던 육필과 소품 등을 보며 미소지었다. 칠이 벗겨진 낡은 의자에 앉으면서는 반가운 듯 환하게 웃었다. 약력을 설명하는 전시물에 인쇄된 함경남도 덕원신학교 재학 시절 까까머리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루만졌다.

윤 대주교는 금남로에 서린 5·18의 뜻이 후대에 오랫동안 전달되길 희망했다.

윤 대주교는 "독일이 아우슈비츠에서 벌인 유대인 학살을 끝없이 반성하는 것처럼 1980년 5월 금남로에서 있었던 일들이 끝없이 기억돼야 한다"며 "5·18과 민주영령들에 대한 기억이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고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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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영광 / 나권식 기자 다른기사보기